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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오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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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오 빈은 1899년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전향하여 극우 민족주의자로 변모했다. 그는 건국회를 창립하고 소련과 공산주의를 반대하며 친미, 반공주의를 표방했다. 1942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도조 히데키 총리를 비판하여 제명되었다. 전후 대일본애국당을 결성하여 총재를 맡았으며, 한국을 지지하고 독도 폭파를 주장하는 등 극단적인 주장을 펼쳤다. 1990년 사망하기 전까지 선거에 여러 차례 출마했으며,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및 시마나카 사건 연루 의혹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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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오 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2년의 아카오 빈
1942년의 아카오
원어 이름아카오 빈 (赤尾敏)
출생일1899년 1월 15일
출생지히가시구, 나고야시, 일본
사망일1990년 2월 6일
사망지도시마구, 도쿄, 일본
소속 정당무소속 (1942–1945)
대일본애국당 (1951–1990)
배우자아카오 도미에
친족조카: 아카오 유미
경력
직책일본 중의원 의원 (도쿄 6구)
임기 시작1942년 5월 1일
임기 종료1945년 12월 18일

2. 생애

아카오 빈은 1926년 투옥 중 전향하여 초국가주의로 전향, 일본 우익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소련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1] 같은 해, 1920년대 주요 초국가주의 단체인 건국회를 공동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약 12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아카오는 법학자 우에스기 신키치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우에스기는 아카오가 자신의 집에서 건국회를 운영하도록 허락했다.[1] 옥중에서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의 서적을 읽고, 1926년 메이데이에 대항하기 위해 '건국제'를 기획, 아라키 사다오 등의 찬동을 받아 전국에서 12만 명을 모아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카오는 건국제의 상설 기관으로 건국회를 결성, 회장에 우에스기 신키치를 맞이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아카오 사상의 일관된 특징 중 하나는 미국의 힘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는 미국이 일본에게 너무 강력하여 미국과의 전쟁은 어리석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다. 대동아 전쟁에 관해서는 "미국과 전쟁하는 것은 공산주의소련의 책략에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며 대미 전쟁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우익이면서도, 전시 하 정부의 국책에 적대하는 반체제파였다.

1942년 익찬 선거에서 '비추천 후보'로 당선되었다. 1943년 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방해 행위를 하여 의장 퇴장 처분을 받고, 제명되었다. 우익이면서도 소신을 관철한 반체제파 의원으로서의 행동이 두드러졌다. 1945년 8월 패전 후, 전 국토를 순회하며 우익 활동과 계몽 강연 활동을 통해, 패전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것을 주장했다.

1945년 아카오는 재선에 실패했고, 미국의 일본 점령군에 의해 전시 지도자로 숙청되었다. 역코스의 일환으로 1951년에 숙청이 해제되자, 선출직 복귀를 맹세하며 맹렬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표방한 대일본애국당(GJPP)을 창당했다.[3] 아카오는 대일본애국당 당원으로 여러 선출직에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점차 선거 승리보다 논쟁 유발에 더 관심을 두는 듯했다. 그의 소음 트럭과 길거리 연설은 이후 우익 단체의 모델이 되었다.[3] 제2차 세계 대전GHQ에 의해 공직 추방되었다가, 1951년 추방 해제 후 대일본애국당을 결성하여 총재가 되었다. 1952년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안보 투쟁 기간 중 미일 안보 조약 반대 시위에서 아카오는 일본이 공산주의 혁명 직전에 있다고 확신, 우익 단체를 규합해 반대 시위에 참여하려 했다.[3]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범 야마구치 오토야시마나카 사건 주동자 코모리 카즈타카는 모두 대일본애국당의 17세 회원이었다가, 범행 직전 탈당했다. 이 때문에 아카오가 두 사건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4] 아카오는 시마나카 사건 이후 살인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증거 부족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대신 치안 방해 및 협박 혐의로 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야마구치 오토야가 일으킨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에서는 조사를 받았고, 시마나카 사건에서는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아카오는 활동을 계속하여 미국 국기와 유니언 잭을 히노마루와 함께 자신의 선전 차량에 게양했으며, 개정된 안전 보장 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강력히 지지했다. 긴자스키야바시에서의 즉석 연설은 그 지역 명물이었다. 선전 차량을 도입한 우익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가두 선전 차량에는 일장기, 욱일기와 함께 성조기, 유니언 잭을 내걸고, "소련·중공을 치기 위해 일본은 미국·영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며 철저한 친미·친영을 강조했다. 미일 안보에 긍정적이었다.

아카오는 반공주의를 이유로 대한민국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한국과 일본 간의 긴밀한 동맹을 옹호했다. 아카오는 독도가 양국 간의 우호 관계에 걸림돌이 된다며 독도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의 사망 이후 아카오는 90세의 나이로 15번째 참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쇼와 천황의 대례에 이어, 1989년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도쿄도 선거구에서 만 90세로 출마, 정견 방송에서 의욕적인 연설을 했다. 아카오는 1990년 2월 6일, 91세의 나이로 도쿄도 토시마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6]

2. 1. 초기 생애 (1899년 ~ 1926년)

아카오 빈은 1899년 1월 15일 나고야시 히가시구에서 철물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카오는 어린 시절 허약했고, 아이치현 제3 중학교에 재학 중 결핵에 걸렸다. 그는 회복을 돕기 위해 아버지 소유의 미야케 섬 농장을 관리하도록 보내졌다. 섬에 있는 동안 아카오는 훗날 일본 사회당 위원장이 되는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훗날 아카오의 대일본애국당의 일원이 되는 이네지로의 먼 친척인 아사누마 미치오를 알게 되었다.

농장에서 아카오는 시인 겸 철학자 무샤노코지 사네아쓰가 옹호한 '신 마을 운동'의 이상을 바탕으로 한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 공산주의를 시행하여 유토피아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특히 농장의 농산물은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농장의 모든 노동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아카오의 섬 이웃들은 그의 관행에 위협을 느껴 법적인 술책을 통해 그에게서 농장을 빼앗았다.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에 실망한 아카오는 본토로 돌아와 도쿄에 정착하여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오스기 사카에, 다카바타케 모토유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아카오는 징병된 후 일본의 일왕 체제를 비판하는 연설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아카오는 일본의 좌익 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곧 좌익 정치 전체를 포기했다.

아카오 빈(赤尾敏)은 1899년(메이지 32년) 1월 15일,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철물상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업인 직물업을 잇지 않고 중소 기업가가 되어 철물, 목탄 판매, 어업, 목장 등을 폭넓게 경영했으며, 자유주의지식인이었다.[1]

고등소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 교사로부터 "태합(太閤) 히데요시는 짚신 장수에서 천하를 얻었다"라는 말을 듣고 "나도 공부하면 총리대신이 될 수 있다"라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그는 총리대신을 장래의 희망으로 삼았다.[1]

2. 2. 사회주의에서 극우 민족주의로 전향 (1926년 ~ 1945년)

1926년, 아카오는 투옥된 상태에서 전향하여 초국가주의로 "개종"했고, 일본 우익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그는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1] 그 해, 아카오는 1920년대 주요 초국가주의 단체인 건국회의 공동 창립자이자 회장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약 12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아카오는 법학자 우에스기 신키치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우에스기는 아카오가 자신의 집에서 건국회를 운영하도록 허락했다.[1]

아카오는 미국의 힘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다. 그는 미국이 일본에게 너무 강력하여 미국과의 전쟁은 어리석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졌다.

1942년 선거에서 아카오는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은 "비추천 후보"로 국회 도쿄 6구 의원 자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도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고, 일본 전체에서 네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다른 무소속 정치인 후보들처럼, 아카오는 당선 후 대정익찬정치회에 가입해야 했지만, 1943년 6월 도조 히데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후 그 조직에서 제명되었다.[2]

결핵을 앓았던 아카오는 요양을 위해 미야케지마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소설가 무샤노코지 사네아쓰가 주창하던 새로운 마을 운동을 실천하고자, 실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미야케지마 목장의 경영을 위임받아 공동 농장을 운영했다. 농장에서는 계급 구분 없이 평등하게 작물이 분배되었고, 소설가 고다 로한은 아카오의 이상에 공감하여 그와 면담했다. 이때 아사누마 이네지로 등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농장은 섬의 유력자들에게 속아 빼앗기게 된다.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도 도쿄의 사카이 토시히코 등에게서 사회주의를 배우고, 좌익 운동을 했다. 군사 훈련 중 천황제 비판 연설로 구속되고, 지역 재계 유력자에게 활동 자금을 요구한 것이 공갈 미수로 체포되었다. 동료였던 기자에게 비판받은 것을 계기로 좌익 운동에 실망한 아카오는 옥중에서 전향을 결단한다.

아카오가 이끄는 건국회가 고안한 '매화의 절구' 인형 (1933년)


아카오는 옥중에서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의 서적을 읽었다. 1926년, 메이데이에 대항하기 위해 '건국제'를 기획했다. '건국제'는 아라키 사다오 등의 찬동을 받아 전국에서 12만 명을 모아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카오는 건국제의 상설 기관으로 건국회를 결성, 회장에 우에스기 신키치를 맞이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1933년 경 기원절에 맞춰 새로운 절기 '매화의 절구'를 고안하여 진무 천황을 최상단에 모신 인형까지 만들었지만,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8]1937년 도쿄 시의회 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9]

대동아 전쟁에 관해서, 아카오는 "미국과 전쟁하는 것은 공산주의소련의 책략에 넘어가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며 대미 전쟁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우익이면서도, 전시 하 정부의 국책에 적대하는 반체제파였다.

1942년 익찬 선거에서 '비추천 후보'로 당선되었다. 1943년 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방해 행위를 하여 의장 퇴장 처분을 받고, 제명되었다. 우익이면서도 소신을 관철한 반체제파 의원으로서의 행동이 두드러졌다. 1945년 8월 패전 후, 전 국토를 순회하며 우익 활동과 계몽 강연 활동을 통해, 패전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것을 주장했다.

2. 3. 전후 활동과 대일본애국당 창당 (1945년 ~ 1990년)

1945년 아카오는 재선에 실패했고, 그 직후 미국의 일본 점령군에 의해 전시 지도자로 숙청되었다. 역코스의 일환으로 1951년에 숙청이 해제되자, 선출직 복귀를 맹세하며 맹렬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표방한 대일본애국당(GJPP)을 창당했다.[3] 아카오는 대일본애국당 당원으로 여러 선출직에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점차 선거 승리보다 논쟁 유발에 더 관심을 두는 듯했다. 그의 소음 트럭과 길거리 연설은 이후 우익 단체의 모델이 되었다.[3]

1960년, 안보 투쟁 기간 중 미일 안보 조약 반대 시위에서 아카오는 일본이 공산주의 혁명 직전에 있다고 확신, 우익 단체를 규합해 반대 시위에 참여하려 했다.[3]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범 야마구치 오토야시마나카 사건 주동자 코모리 카즈타카는 모두 대일본애국당의 17세 회원이었다가, 범행 직전 탈당했다. 이 때문에 아카오가 두 사건을 지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다.[4] 아카오는 시마나카 사건 이후 살인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증거 부족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대신 치안 방해 및 협박 혐의로 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제2차 세계 대전GHQ에 의해 공직 추방되었다가, 1951년 추방 해제 후 대일본애국당을 결성하여 총재가 되었다. 1952년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친미반공 입장으로 우익 활동을 하며 각종 선거에 입후보, 참의원 전국구에서는 최고 122,532표(제6회 참의원 선거)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잦은 선거 출마는 선거 기간 중 길거리 즉석 연설이 주된 이유였다고 한다. 참의원 불필요론을 주장하며, 참의원 선거 때마다 자신에게 투표하지 말고 기권할 것을 호소했다.

야마구치 오토야 (사건 당시 탈당)가 일으킨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에서는 조사를 받았고, 시마나카 사건에서는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사와키 고타로의 『테러의 결산』에 따르면, 야마구치는 아사누마의 "미국 제국주의는 일중 양국 인민의 공동의 적" 발언에 살의를 느꼈다고 한다(본인의 "참간장"에도 언급). 아카오가 개인적 친분이 있던 아사누마를 "선인이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평한 것도 암살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사건 후 아카오는 아사누마의 부인 쿄코 및 미키 무츠코와 전화 연락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1961년 2월 시마나카 사건과 관련, 경시청애국당 총재 아카오 사토시를 배후로 보고 2월 21일 살인 교사, 살인 미수 교사 등으로 체포했지만, 4월 17일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아메리칸 어셈블리와 국제 친선 일본 위원회 주최 제2회 시모다 회의 첫날, 장발을 휘날리며 수 명과 함께 로비로 난입하려 한 적이 있다. 일장기를 흔들며 호텔로 올라온 아카오는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 재군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에 체포되었다.

긴자스키야바시에서의 즉석 연설은 그 지역 명물이었다. 선전 차량을 도입한 우익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가두 선전 차량에는 일장기, 욱일기와 함께 성조기, 유니언 잭을 내걸고, "소련·중공을 치기 위해 일본은 미국·영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며 철저한 친미·친영을 강조했다. 미일 안보에 긍정적이었다.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1989년 참의원 선거 정견 방송에서 도이 다카코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발언한 것을 비판했다. 한국에도 반공주의 때문에 호의적이었으며, "북한 타도를 위해 한일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와 천황의 대례에 이어, 1989년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도쿄도 선거구에서 만 90세로 출마, 정견 방송에서 의욕적인 연설을 했다. 국정 선거 최고령 입후보자는 94세로 출마한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오자키 유키오 (낙선 후 은퇴),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가와시마 료키치 (사이타마 12구)에 이어 3번째이다.

저서로는 『일본의 외교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멸공 반소인가 반영미인가』 외 다수가 있다. 1990년 2월 6일 오전 9시 26분, 도쿄 도립 오쓰카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요코스카시 도코지이다.

2. 4. 말년 (1989년 ~ 1990년)

1989년 히로히토 천황 사망 이후, 아카오는 90세의 나이로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도쿄도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정견 방송에서 연설했다.[6] 국정 선거 최고령 입후보자는 94세로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한 오자키 유키오이며, 아카오는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한 가와시마 료키치에 이어 역대 3번째 고령 입후보자였다.[6]

1990년 2월 6일, 아카오는 91세의 나이로 도쿄도 토시마의 도쿄 도립 오쓰카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6] 묘소는 요코스카시 도코지에 있다.[6]

3. 사상 및 정치 활동

아카오 빈은 1926년 투옥 중 전향하여 초국가주의로 "개종"하고 일본 우익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1] 같은 해, 1920년대 주요 초국가주의 단체인 건국회를 공동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약 12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아카오는 법학자 우에스기 신키치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여러 저명한 회원의 탈퇴로 단체가 본부를 운영할 자금을 잃게 되자 우에스기는 아카오가 자신의 집에서 건국회를 운영하도록 허락했다.[1]

아카오 사상의 일관된 특징 중 하나는 미국의 힘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는 미국이 일본에게 너무 강력하여 미국과의 전쟁은 어리석다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다.

1942년 선거에서 아카오는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은 "비추천 후보"로 국회 도쿄 6구 의원 자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도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고, 일본 전체에서 네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다른 무소속 정치인 후보들처럼, 아카오는 당선 후 대정익찬정치회에 가입해야 했지만, 1943년 6월 도조 히데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후 제명되었다.[2] 1945년 재선에 실패한 후, 미국의 일본 점령군에 의해 전시 지도자로 숙청되었다가 1951년 역코스의 일환으로 숙청이 해제되어 선출직으로 복귀할 것을 맹세했다.

1960년, 안보 투쟁 기간 중 미일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아카오는 일본이 공산주의 혁명의 문턱에 와 있다고 확신하고 우익 단체를 규합하여 반대 시위에 참여하려 했다.[3]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암살한 야마구치 오토야, 시마나카 사건을 저지른 코모리 카즈타카는 모두 대일본애국당의 17세 회원이었다.[4] 아카오는 시마나카 사건 이후 살인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증거 부족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대신 치안 방해 및 협박 혐의로 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1960년 1월, 경시청은 아카오의 집에서 좌파 성향의 문화인, 저널리스트, 학자들을 괴롭히는 데 사용된 "갈고리 십자 포스터"를 압수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당일, 당원 10여 명은 히비야 공회당 앞에서 3, 4번째 자리에 자리 잡았다. 야마구치가 아사누마 위원장을 습격한 직후, 아카오는 옆 사람에게 "애송이(야마구치), 잘못했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뉴스 영화 "마이니치 뉴스"에는 "애송이가 잘했다, 훌륭하다"라는 발언과 당시 닛쿄소 위원장 살해를 계획하고 상경한 소녀를 환영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

10월 29일, 아카오는 위력 업무 방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11월에는 다이일본애국당이 파방법 조사 대상 단체로 지정된다. 애국당원이던 야마구치 오토야가 일으킨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에서는 취조를 받았다. 아카오는 개인적으로 교류가 있던 아사누마를 평하여 "선인이기 때문에 처치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야마구치의 자살 2일 후, 아카오 총재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라며 석방되었다. 다만 시마나카 사건이 발생한 후, 처음으로 행사장의 삐라 살포와 아사누마 위원장의 연설 방해에 대해 기소되었지만 역시 혐의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3. 1. 친미, 반공주의

아카오 빈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1] 그는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대일본애국당을 창당했다. 가두 선전 차량에는 일장기욱일기와 함께 성조기유니언 잭을 내걸고 "소련·중공을 치기 위해 일본은 미국·영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며 철저하게 친미·친영을 어필했다. 미일 안보에 긍정적이었다. 한국에도 반공주의 때문에 호의적이었으며, "북한 타도를 위해 한일은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1]

3. 2. 한국과의 관계

아카오는 반공주의를 내세워 대한민국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한국과 일본 사이의 긴밀한 동맹을 옹호했다.[6] 또한 독도가 양국 간 우호 관계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독도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3. 3. 기타


1986년의 아카오

  •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참의원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고 낙선하는 것을 반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좌익 활동에서 느꼈던 분노를 바탕으로 세상의 모순을 규탄하며, 나고야벤을 사용한 광신적인 연설은 시중에서 일정한 지지자를 얻었다.
  • 미야케섬으로 요양을 간 적이 있어, 미야케 섬 출신인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한때 깊은 친교를 맺었지만, 만년의 아사누마 사건으로 인해 미야케 섬 사람들 전체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아카오는 그 일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 만년까지 라이프 워크로 삼았던 길거리 설법 장소로 스키야바시를 선택한 것은, 당시 유라쿠초에 있었던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 근처였으며, 아사히 신문 비판도 목적 중 하나였다고 쓰쿠시 데쓰야가 증언하고 있다. 아카오의 사망 당일, 전 아사히 신문 기자였던 쓰쿠시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부고를 전할 때, "테러리스트를 낳았던 당시(아사누마 사건) 일에 친근감을 느낄 이유는 없지만, 매일같이 '바보 자식'이라고 들었던 입장에서는, 애교 있는 인품에 그리움도 느낀다"라고 회상했다[11]. 아사히 신문1980년쓰키지로 도쿄 본사를 이전했지만, 아카오는 그 후에도 사망 직전까지 스키야바시에서 길거리 설법을 계속했다. 후년, 조카 유미가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7년)에 입후보했을 때, 과거 숙부 아카오가 설법을 했던 이 스키야바시 교차로에서 가두 연설을 했다.
  • 사망 전 해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12]에서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돈이 갖고 싶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말이지, 젊은 시절부터 공상가라서 돈 생각을 하지 않고 해왔지. 90세가 되어서야 돈의 소중함을 알았으니, 이제 늦었지(웃음). 수십 년 지기인 사사카와 료이치 같은 사람은, 몇 천억의 돈을 가지고 있지. 나는 아무것도 없어. 유물론은 아니지만, 물건은 소중하지. 예를 들어 공기라도 인간은 30분 동안 마시지 않으면 죽어버리잖아. 공기가 있으면 인간, 영혼이 있든 없든 의식을 잃어도 살아갈 수 있지. 공기조차 물건이잖아. 그러니까 물건은 소중한 거야. 물건의 현실적인 대표는 돈이지. 나는 아무런 재산이 없어. 지팡이 하나가 재산이지"라고 발언했다.
  • 1965년 1월 31일, 나가사키현사세보항으로 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가 입항했을 때 항의 연설을 하기 위해 사세보시로 갔다가,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몰던 16세 소년에게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아카오는 그 소년이 일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16세의 젊은 나이에 일을 하고 있다니 감탄스럽다"라며 고소하지 않았다.
  • 나리타 공항 예정지의 대집행 당시, 아카오는 현장에 도착하여 산리츠카 투쟁을 벌이던 반대파 농민들에게 비판 연설을 했다. 이때, 산리츠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이 세운 농민 방송탑에 검은 테두리로 둘러싸인 일장기가 있는 것을 보고 아카오는 격노했지만, 다른 요새에 진짜 일장기가 있는 것을 발견하자 "이건 좋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3].
  • 아카오는 최후까지 방에 메이지 천황, 석가모니 부처, 예수 그리스도의 큰 초상화를 장식했다고 한다.

4. 논란 및 비판

아카오 빈은 전향 이후 초국가주의 및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여러 논란과 비판에 휩싸였다.

아카오는 미국의 힘을 존경하여 태평양 전쟁에는 반대했지만,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1926년에는 초국가주의 단체인 건국회를 공동 창립하고 회장을 맡기도 했다.[1]

1942년 선거에서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지 않고 국회 의원 자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943년 도조 히데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대정익찬정치회에서 제명되었다.[2] 1945년 재선에 실패한 후, 미국의 일본 점령군에 의해 숙청되었다가 1951년 해제되었다.[1] 이후 대일본애국당을 창당하여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표방하며 선출직에 도전했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1960년 안보 투쟁 기간 중, 아카오는 우익 단체를 규합하여 미일 안보 조약 반대 시위에 맞서는 반대 시위에 참여하려 했다.[3]

4. 1.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및 시마나카 사건 연루 의혹

1960년 아사누마 이네지로 일본사회당 위원장 암살 당시,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으며(사건 직전 탈당), 이로 인해 아카오 빈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았다.[4] 아카오 빈은 평소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선인이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평가했었다.[5]

1961년 2월에 발생한 시마나카 사건과 관련하여, 경시청대일본애국당 총재였던 아카오 빈이 배후에 있다고 판단, 살인 교사 및 살인 미수 교사 혐의로 체포했다.[5] 그러나 4월 17일,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5]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아카오 빈은 대중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극우적 정치 활동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4. 2. 극단적 주장

아카오 빈은 미국의 힘을 존경하여 태평양 전쟁에는 반대했지만,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미일 안보 조약을 지지했으며, 반공주의를 이유로 대한민국을 강력히 지지하며 한일 우호 관계를 옹호했다. 그는 독도가 양국 관계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 독도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

5. 가족

관계이름
조부아카오 시즈마
동생아카오 시로 (아카오 알루미 창업자)
아카오 후미에 (1913년-2006년 7월 14일)
아들아카오 타로 (1940년-1942년 10월 25일)
아들아카오 미치히코
조카아카오 유미[10]


6. 선거 이력

선거명선거구결과비고
1937년 도쿄 시의회 의원 선거도쿄시 아라카와구낙선
1942년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부 제6구당선
1952년 제24회 중의원 보궐 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52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55년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56년 제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59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59년 제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60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63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67년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67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68년 제8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6구낙선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71년 제9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74년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75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79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80년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83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83년 제13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83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도쿄도 제1구낙선
1986년 제1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1987년 도쿄도지사 선거도쿄도낙선
1989년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도쿄도 선거구낙선


참조

[1] 서적 Japan's Holy War: The Ideology of Radical Shinto Ultranationalism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2009
[2] 서적 Populist Nationalism in Pre-War Japan: A Biography of Nakano Seigo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0-10-18
[3]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5] 뉴스 High Court Upholds Sentence of Akao 1962-10-24
[6] 뉴스 91-year-old rightist leader, street politician Bin Akao dies 1990-02-07
[7]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8] 서적 昭和 二万日の全記録 第3巻 講談社 1989
[9] 웹사이트 普通選挙期における東京市会議員総選挙の結果について http://www.fl.reitak[...]
[10] 뉴스 高須克弥×赤尾由美 赤尾敏が存命ならば「トランプ大統領」をどう見ただろうか? https://www.sankei.c[...] 2016-06-11
[11] 방송 筑紫哲也 NEWS23 1990-02-06
[12] 방송 NONFIX・ある右翼ー人間・赤尾敏〜今日も数寄屋橋に立つ〜 フジテレビ 1989
[13] 서적 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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